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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목소리 Edith Piaf

2010년 영화계 최고의 히트작 인셉션!

인셉션 하면 떠오르는 건 일단 어렵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필자도 두 번 보고 이해 했다. 그리고 영화에서 ‘킥’의 신호로 쓰이는 노래 Non, je ne regrette rien

 올드 팝을 접하기 힘들었던 세대는 인셉션을 계기로 Edith Piaf의 존재를 알게 되었겠지만, 사실 프랑스에선 서거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러 영화와 책을 통해 그녀의 인생을 재 조명하고 있고 탄생 10주년 20주년, 서거 10주년, 20주년 등등 의미를 가질 수 있는 해마다 기념음반들을 쏟아내 그녀를 기억하고 있으며, 뛰어난 여가수가 등장 할 때면 항상 “제 2의 Edith Piaf”라는 칭호를 붙인다.

 그녀가 단순히 엄청 유명했던 왕년의 스타라서가 아니다. 모든 노래를 모국어로 녹음 한 건 아니지만 대부분의 노래를 프랑스어로 녹음한 그녀는 전 세계 문화시장을 잠식하려는 미국문화에 대응하는 민족적 자존심 이자, 시대를 초월한 “프랑스의 목소리” 인 것 이다. 이러한 평가는 프랑스만으로 국한된 것이 아니다. 샹송을 범 지구적 음악으로 발전시킨 ‘샹송의 세계화’의 상징이며 미국의 시사 주간지 뉴스위크 에서는 ‘20세기 100년의 스타들’이란 특집을 통해 ‘Edith Piaf가 프랑스에게 영원한 목소리를 주었다(She gave France an enduring voice)’고 하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녀가 20세기의 위대한 음악유산으로 기록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하다. 사력을 다해서 열정과 진실로 노래했다는 것 이다. 엄청난 중량감이 담겨진 그 가창력이 ‘참새(Piaf)’ 같이 왜소한 체구에서 나온 것을 알고 나면 더욱 경이롭다.

 

파란한장한 삶을 노래하는 신성한 광기

 

1915년에 태어나 2차 세계대전 초반인 1939년에 스타덤에 오르기 전 까지 Editimages.jpgh Piaf의 인생은 상상 이상으로 비참했다. 서커스 단원으로 일하던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가 태어나자마자 군에 소집되었고 홀로 그녀를 키우기 버거웠던 어머니는 그녀를 외할머니에게 맡기고 떠나버렸다. 외할머니는 술꾼들 틈에서 손녀를 키웠고, 제대 후 돌아온 아버지는 다시 그녀를 노르망디에서 사창가를 운영하고 있던 자신의 어머니에게 맡겼다. 어린 나이부터 시작한 숱한 고생으로 6살에 잠시 시력을 잃기도 했던 그녀는 10대 무렵부터 노래를 부르며 동냥으로 생계를 유지 했다. 거리 위 삶을 살아가던 그녀는 16살에 한 군인과 관계를 갖고 첫 딸 Marcelle를 출산했지만 아이는 2년 후 수막염으로 사망했다.

1935년 그녀가 20살이 되던 해, ‘Gerny’라는 작은 술집의 주인이었던 Louis Leplee가 길에서 노래하던 그녀의 재능을 눈 여겨 보고 그녀를 가게에 데려와 노래 할 수 있게 했고 굴곡진 삶이 베어 나오는 그녀의 가창력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부터 그녀는 Louis Leplee가 붙여 준 ‘La Mome Piaf(작은 참새)’라는 별명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 유럽 전역으로 그 범위를 넓혀갔다. 이 후 작곡가 Ramond Asso와 Maurice Che-valier의 도움으로 그녀의 삶에 돋아났던 오돌토돌한 돌기를 깎고 다듬어 예술로 승화시키게 되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고뇌에 찬 목소리를 가진 그녀는 서서히 샹송계의 스타가 되어 갔다. ‘Edith Piaf’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한 것도 이 즈음부터 이다.

1946년 성공적인 미국 진출로 TV, 라디오, 신문 기타 등등, 그 시대의 미디어란 미디어는 모두 정복하며 Frank Sinatra, Bing Crosby 다음으로 돈을 많이 번 월드스타가 되었지만 그녀의 삶은 여전히 불행했다. 동료가수 이브 몽탕, 헤비급 복싱 챔피언 마르셀 세르당, 자크 필 그리고 26살 연하의 청년 테오 사라포 등 잇단 남자들과의 실연과 결혼실패, 술과 마약, 교통사고. 일그러지고 얼룩진 인생이었지만 한편으로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던 그녀, 모진 풍파 속에 악화되는 건강에도 노래를 포기하지 않았으며 ‘Les Amants De Demain’, ‘Paris Chante Toujours’ 등의 영화에도 출연, 수 세기 동안 기억 될 시대의 아이콘으로 남게 된다. 사람들은 그녀의 노래를 ‘신성한 광기’라고 묘사 한다. 터뜨릴 때를 알았던 것 처럼 속삭여야 할 때를 알았고, 사람의 감정을 뒤흔들어 놓은 만큼, 가라앉혀줄 줄도 알았다. 어떤 전문가들은 결코 잘하는 노래가 아니었다고 주장하지만 ‘20세기 최고의 여가수’로 평가 받는데는 그 진실성와 에너지만으로 충분하다.

48살이라는 길지 않은 생을 마감한 1968년, 파리의 페르 라세즈 공동묘지에서 거행된 장례식에 4만명의 인파가 운집한 이래 수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Edith Piaf를 추모하는 행렬이 끊이지 않고 있다.

 

“Piaf는 안락과 돈이란 조금도 없이 시작해 길거리에서 노래했다. 흑인 랩 가수들과 다를게 없다. 진실로 사랑의 이야기와 세상의 곤궁을 노래했다는 점 에서 그녀는 혁명적이었다”

 – Liane Foly –

모어뮤직이 추천하는 그녀의 노래들

 

Non, je ne regrette rien(아니요. 전 후회하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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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파니 핑크와 인셉션으로 재조명 되었던 Edith Piaf의 마지막 대히트 곡 이며 그녀의 인생 후반기의 명곡으로 너무나도 유명하다. 가슴 속 깊은 곳까지 헤집어 놓는 가공 할 만한 전율을 주는 이 곡은 프랑스의 My Way로도 평가된다.

 

 
Non,Je Ne Regrette Rien Hymne A Lamour…The Best Of Edith Piaf  
 

Hymne a l'amour(사랑의 찬가 English Ver)

 

여러 남자들과 스캔들이 있었던 Edith Piaf. 이 가운데 시대를 초월해 잊혀지지 않을 애달픈 로맨스가 하나 있었으니, 바로 권투선수 마르셀 세르당과의 사랑이야기 이다. 미국과 유럽을 오가며 활동하던 중 만나게 된 마르셀 세르당과 사랑에 빠진 그녀. 1948년 이들은 결혼했고 그녀는 사랑이 충만한 삶을 살게 되고 진실한 삶을 체험한다. 하지만 이듬해 마르셀 세르당은 공연일정으로 멀리 떠나있던 Edith Piaf를 만나기 위해 탄 비행기가 추락하며 세상을 떠났다. 1950년 너무도 사랑했던 그에게 바치는 이 곡을 만들어 발표 했고 이 애절한 러브송은 그녀가 사랑을 하기 위해 태어난 가수라는 평을 들을 만큼 아름다운 가사와 멜로디로 청중들의 감성을 자극 했다. Piaf를 대표하는 걸작을 넘어 샹송을 대표하는 걸작!

 
Hymne A LAmour(If You Love Me,Really Lov.. Hymne A Lamour…The Best Of Edith Piaf  
 

 A Quoi Ca Sert L'Amour (사랑이란 바로 그런거지)

 

‘Non, je ne regrette rien’와 함께 Edith Piaf의 만년 최고의 명곡으로 꼽히는 곡 이다.사랑을 잃고 술과 마약에 지탱하던 삶을 추스린 1961년 겨울 그녀는 그리스 태생의 미용사 테오파니스 람부카스를 소개받는데, 그녀는 그를 그리스어로 ‘사랑해’라는 뜻인 ‘Sarapo’라고 부르게 되고, 1962년 무려 26살이나 연하인 그와 결혼한다. Sarapo는 그녀에게 마지막까지 일하는 활력을 준 사람이며, 그녀는 그에 대한 사랑과 고마움을 이 노래로 표현 한다.

 

 
A Quoi Ca Sert LAmour Hymne A Lamour…The Best Of Edith Pia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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